나는 오늘 점심에 롯데리아 햄버거를 먹었다

나는 오늘 점심에 롯데리아 햄버거를 먹었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취향과 의지에 기반을 둔 선택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롯데리아 햄버거라는 자본주의의 표상을 근거로, 나에겐 이미 선택권이 없었다고 단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크라제 버거를 먹지 못했다! 내가 롯데리아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권력 때문이고, 이 권력을 자본(이라는 헤게모니)이라고 규정한 그의 이름은 맑스다.

그러나 푸코는 맑스와 달리 저 제목에서 점심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왜 나는 점심시간에, 정확히 말해 ‘12시에서 1시 사이에 무언가를 먹어야만 했는가? 그는 권력이란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여 그 한 시간 사이에 나로 하여금 밥을 먹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삽시간에 자유를 박탈당한 나는 이렇게 변호하리라. ‘나는 점심메뉴를 마음대로 고를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다.’ 그러면 푸코는 다시 묵묵히 권력의 계보학을 펼쳐 보이며 말 할 것이다. ‘그렇다, 너는 무언가 공부를 해야 하고, 직업을 가져야 하며, 정해진 곳에 살아야 한다.’ 그에게 권력이란 그렇게 작용해왔고, 더 견고하게 작용하고 있는 바로 그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한 계보학적 방법은 그렇게 규율훈육된 나를 설명한다.

말하기 쑥스럽지만 나는 군대에서 정확한 제식을 훈육 받은 몸이다. 그곳엔 틀린 걸음걸이와 심지어 틀린 시간이 존재한다. 예컨대 6시가 아닌 555분은 틀린 기상시간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로 5분 일찍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다가 선임병에게 혼쭐난 적이 있다.) 그 병영의 담벼락에서 빠져나와 하루 빨리 자유를 과식하고 싶었고, 전역 날,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1교시 수업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 기상한다. 학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직장의 울타리 안에서 그러하리라. 비극적이게도 나는 그 안에서 정상인의 안도를 맛보리라.

나는 롯데리아 햄버거보다는 자유를 탐식하고 싶지만, 실은 거식증에 걸린 몸이다. 몸은 솔직한 법이라서, 자유를 바라보면서도 안도의 늪에서 발을 빼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이기 때문에 빼기 힘든 부분도 있다. 그러나 하루 평균 84번 나를 촬영하는 CCTV가 감시라기보다 안도의 장치로 여겨지는 것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안정이 자유보다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내면화된 시스템은 나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아무리 보헤미안과 아나키즘을 입 밖에 꺼낸다 하더라도, 거식증에 걸린 몸이 유일하게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은 안도뿐이다. 가끔씩 반찬으로 나를 거식증에 빠뜨린 시스템을 욕하기도 하면서.

문제는 이렇다. 시스템은 나에게 끊임없는 고해성사를 요구한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의 끝머리에 인용한 재판의 경우처럼 그들은 나의 집을 물으며, 나의 직업을 조사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감시한다. 이것이 심문이 아니라 고해성사인 이유는 그것이 선사하는 면죄와 안도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려면 이미 우리 안에서 공고히 자리 잡은 시스템을 부정해야 한다. 심문을 고해성사로 만든 자신을 먼저 소거해줘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자유란 스스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부정하여 내 안의 권력이 없는 아나키 상태를 만들어야 획득된다.

그런데 그렇게 얻게 될 자유를 다자이 오사무는 부끄럽다고 했다. 한번은 네이버에서 인간실격에 대한 네티즌 평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중 상당수가 그저 치졸한 인생을 묘사한 이 따위 글도 문학이냐는 내용이었다. 아찔한 장면이다. 소설 속 규율 안에서 요조는 인간실격이었고, 오사무 역시 덩달아서 이 세계의 비정상인이 되고 말았다. 시스템에서 벗어난 삶을 그리는, 시스템에서 벗어난 자. 나는 여기에서 권력에 대한 예술의 기능을 발견한다.

예술은 권력의 껍질을 벗겨내는 과도로 작용한다. 예술은 끊임없이 권력을 벗겨내어 은닉된 알맹이를 드러낸다. 그것의 발현은 언제나 아나키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이다. 예술은 언제나 세계와 마찰을 겪고, 그 마찰의 상처 속에서 새살을 돋운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해체할 때나 뒤샹이 변기를 떼어올 때, 워홀이 캠벨수프를 얹어놓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사무가 요조를 인각실격시키듯 카프카가 벌레로 변신할 때나 이상이 박제될 때, 박민규가 세상을 낯설게 할 때 우리는 규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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